top of page
IMG_1369_edited.jpg
  • 유튜브
  • 페이스 북 사회 아이콘

2 예배 찬송의 의미와 역사

2-2-2 찬송의 역사 part2

2) 초기교회의 찬송

이번 장에서는 초기교회[1] 찬송에 배경이 되는 회당과 다락방 찬송에 대해 먼저 살펴볼 것이다. 이후 헬레니즘 종교들과 초기교회 이단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당시 찬송에서 나타났던 악기 배제 현상과 성악(아카펠라) 찬송의 형태를 띠게 된 원인을 관찰할 것이다. 

 

(1) 회당과 다락방

침묵의 시기를 지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교회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2] 그 시기 기록된 신약은 당시 역사, 문화 종교적 상황 속에서 배태되었다.[3] 최초의 예배는 회당과 집에서 드렸는데, 회당 예배는 말씀에 초점을, 집에서의 예배는 주의 만찬을 위해 모였고 이 두 전통에서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 예전의 기원을 볼 수 있다.[4]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바벨론 포로 시기 회당 찬송은 성전 찬송과 달리 악기를 포함하지 않는다.[5] 이후 회당의 기능은 초기교회의 박해로 유대인들이 흩어지면서 더욱 발전되었다.[6] 회당에서는 주로 율법서 낭독(눅4:16)과 성경 해석(눅4:21) 그리고 시편 회중 찬송을 불렀으며, 히브리인들은 회중 찬송 또는 교창(Antiphonal)[7]의 형식으로 시편을 노래하였다.[8] 그러므로 초기교회 찬송은 주로 옛 시편들이 사용되었고 이후 새로운 시편들이 작곡됐다.[9] 정황상 초기 예배음악은 히브리 문화와 헬라문화 그리고 2-3세기 이후의 라틴 문화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10] 하지만 이러한 형성 과정이 초기교회 음악에 세속화에 영향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이교도들과 구별되기 위해 차별성을 두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이것에 근거는 정황상 초기교회사에 나타났던 세속에 대한 강한 저항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유대교의 성전 예전과 당시 헬레니즘 종교들의 제의에서는 악기를 사용하였다.[11] 헬레니즘 종교의식에 사용되었던 파이프의 큰 소리는 제사에 사용되었던 동물에 우는 소리를 잠식시키는 기능으로 사용하였고, 향은 악한 영을 쫓아내는 마법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 사용되었다.[12] 초기교회가 사용한 악기를 제외한 육성 찬송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예배 형식이 되었다.

700px-DuraEuropos-TempleOfBel.jpeg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두라 유로포스 가정 교회][그림 01][13]

초기교회 모임의 비중은 점차 회당 모임에서 다락방 모임으로 이동해갔다. [그림 01]는 1920년 시리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가정 교회 두라 유로포스(Dura Europos) 교회로 이 건물은 가로 5m 세로 13m 크기로 60명 정도 수용 가능한 크기로 작은 침례탕을 소지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14] 사도행전 2장 43-47의 모습은 초기교회가 가정에서 모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기교회의 예배 찬송은 회당과 다락방 모임에 영향을 받았다.[15] 다락방 예배는 매주 첫날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드려 졌으며, 주의 만찬을 거행하도록 구별되었다(행20:7). 특히 주의 만찬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영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고전11:26). 맥스웰은 1세기 예배의 형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회당과 다락방 예전(Christian liturgy) 모델][16]

1부: 회당 예배를 계승하여 발전하게 된 순서

 

 

 

⓵성경 낭독(Scripture Lections:딤전4:13, 살전5:27, 골4:16)

⓶시편과 찬송(고전14:26, 엡5:19, 골3:16)

⓷기도(행2:42, 딤2:1-2)와 회중의 아멘(고전14:16)

⓸설교 또는 강론(고전15:1-4, 행20:7)

⓹신앙 고백(고전15:1-4, 딤전6:12)

⓺헌금(고전14:1-2, 고후9:10-13, 롬15:26)

 

2부: 주님의 만찬

(고전10:16; 11:23, 마26:26-28, 막14:22-24, 눅22:19-20)

⓵봉헌 기도

⓶감사(눅22:19, 고전11:23; 14; 16, 딤전2:1)

⓷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회상(행2:42, 눅22:19, 고전11:23;25;26)

⓸중보기도(요17장)

⓹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17](마6:9-13, 눅11:2-4)

⓺찬송

⓻평화의 임맞춤(롬16:16, 고전16:20, 살전5:26,벧전5:14)

 

 

 초기교회 찬송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가득했다(엡5:19). ‘시’란 시편을 의미하며, ‘찬미’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찬송 즉, 마리아의 찬가(눅1:46)와 빌립보서 2장5-11절 그리고 요한계시록(계5:8; 14:2-3; 15:2-3)의 천국 예배에서 발견되는 찬송 등이나 그와 비슷한 형태의 찬양이라고 판단된다.[18] 신령한 노래에 관해서는 웨익필드(Gordon S. Wakefield)의 주장대로 순간적인 영감하에 만들어진 노래일 것이다.[19] 순간적인 영감이라는 것은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무아지경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20] 초기교회는 교회의 질서를 강조했다(고전14:40). 현대 음악에서도 이와 비슷한 성격의 즉흥 연주(improvisation) 또는 스캣(scat)이 있다. 이것은 일정한 형식 안에서 자유롭게 연주(가창)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자유로운 연주(가장)라는 것은 조성과 코드에 따른 일정한 규칙 위에 일종에 즉흥적 작곡 형태의 솔로 연주(가창)을 하는 것을 말한다.[21] 위에서 설명한 원리를 적용하여 신령한 노래를 이해할 수 있는데, 신령한 노래는 일정한 형식과 리듬, 문장의 형식 등의 틀 안에서 당시의 정서가 담긴 자유로운 음악적 표현이라 판단된다.

(2) 초기교회와 타 종교

역사 신학자 곤자레스(Justo L. Gonzalez)는 초기교회에 시대적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혼합절충주의(Syncretism)는 당시의 유행이었다.[22] 이러한 환경에서 유일한 하나님만 예배하기를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고집 센 광신자들로 보였을 것이다. 이들은 사회의 안녕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암적 존재들이었다.[23]

 

초기교회가 형성될 무렵 다양한 종교 형태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교도 신앙(행14:11-13)은 헬라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은 종교 형태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제우스 등의 수많은 신화 속 신들은 당시 종교 문화를 대표했다. 제우스는 번개와 천둥을, 포세이돈은 바다를 지배하는 신이였으며 아폴로는 병을 치유하고, 아프로디테는 미를 상징하는 신이다(행19:28).[24] 두 번째는 황제 숭배로 옥타비아누스 이후 황제는 죽어서 신이 되어 로마제국의 수호신이 되며 이러한 신앙을 거절한 초기교회 신앙인들은 국가에 반역자로 인식됐다.[25] 세 번째는 신비주의 종교이다. 엘레우시스(Eleusis), 미트라(Mithra), 이시스(Isis), 디오니소스(Dionysus), 키벨레(Cyble) 및 지역 숭배 종교들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씻는 예식, 비밀 식사, 술 취함 등으로 입신[26] 행위 등이 특징이며, 그중 대모신 키벨레의 종교의식은 소의 피로 목욕을 하고, 금식과 통곡, 그리고 팔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는 것 등을 회복과 황홀경의 단계로 인식한다.[27] 네 번째는 미신과 혼합주의이다.[28] 이는 마술과 점성술, 신탁, 복술[29]등으로 점치는 행위를 말한다.[30] 다섯 번째는 영지주의이다. 자신들이 사는 세계는 신의 소외된 작품으로 인식한다. 영지주의는 인식에 기초하였으며[31] 우주론적 철학의 신화화(mythologizing)를 통해 기독교의 신비성을 설명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기독교의 본질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32]여섯 번째는 철학이다. 당시 철학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큰 선으로 인식하는 쾌락주의와 운명론 형태의 스토아 철학, 그리고 세상 욕망을 포기하며 지역을 순회하며 자신의 철학을 전했던 냉소주의 등 세 가지 철학이 주류였다. 일곱 번째는 유대교이다. 유대교는 유일신을 믿었고, 성전 신앙과 종교력에 의한 민족적 신앙을 갖고 있었다. 유대교 분파로는 바리새파, 사두게파, 에세네파, 열심당원 등이 있다. 브루스(F. F. Bruce)는 초기교회 이단들에 대해 가현설, 영지주의, 말시온 주의로 나눈다.[33] 가현설은 물질이 그 자체로 악하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한다.[34]또한 영지주의는 교회 내 깊숙이 들어가 인식을 통한 구원을 주장하며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탈출하므로 구원이 완성된다고 주장하였다.[35] 그들 또한 예수의 인성을 부정한다. 말시온 주의는 구약을 제거하였으며 사도 바울을 통한 구원만을 강조했다.[36] 그들도 그리스도의 육체적 출생을 부인했다. 따라서 초기교회 이단들의 사상의 공통점은 예수님의 인성 거부로 성육신 사건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3) 초기교회 예배와 악기 배제 현상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초기교회는 회당과 다락방의 영향으로 예전(Liturgy)이 형성되었다. 당시 교회는 헬라문화에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다. 외부로는 많은 헬라종교에 대항해야 했고, 내부로는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당시 유대교와도 구별되어야 했다. 웨버는 초기교회가 유대교 예전을 예배에 이식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행6:13-14; 7:49-50).[37] 그들은 유대교의 제사 의식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해석했고, 히브리서 7장 18절에 기록은 유대교 예배와 기독교 예배가 혼합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아가 초기교회와 이교도는 여자 사제의 유무(신23:18-19)[38]와 종교 제의에서 음란 의식(왕상 14:24) 그리고 악기를 첨가한 제사 행위(단3:5; 7) 등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39] 이러한 의미에서 초기교회의 ‘악기 배제 현상’은 종교개혁 시대 이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퍼거슨은 초기교회 역사 속 예배음악은 아카펠라 찬송이었다고 하였다.[40] 그는 현대교회에 공 예배 아카펠라 찬송 사용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 다음 세 가지 논증을 하였다. 그것은 첫째, 신약성경의 증거이며, 둘째, 교회 역사의 증언, 그리고 셋째, 교리(doctrinal)와 신학적(theological) 이유 등이다[41].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아카펠라 찬송은 역사적, 문화적 현상 속에서 파생된 다양한 형태의 찬송 중에 하나쯤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퍼거슨은 신약성경이 아카펠라 찬송의 근거라고 말한다.[42] 구약은 그림자의 역할로 그 기능을 다 하였다(히10:1). 성전은 몸된 교회의 그림자이다(고전3:16; 12:27). 고대 유대 전통인 성전의 예전은 악기가 이스라엘 회중의 찬송과 함께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 탄생 이후 성도들의 찬송에는 어떠한 도구도 필요하지 않는다(요4:24).

3) 종교개혁 시대의 찬송

본 장은 종교 개혁자들의 찬송 중심으로 살펴볼 것인데, 먼저 종교 개혁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개혁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 이후 루터, 칼뱅, 츠빙글리의 찬송 신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서론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본 강좌에서 의미하는 아카펠라 찬송은 다성부 찬송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선율도 포함하고 있다. 라틴어 아카펠라는 ‘교회식으로’의 의미로, 앞에서 살펴보았던 사항이다. 그러므로 이후에 다룰 칼뱅의 단선율은 아카펠라 찬송 신학과 연관성이 있음을 밝힌다.

(1) 종교개혁의 배경과 루터

 

[이사벨라(Isabella), 1500년 11월 20일]

 

교회의 타락은 극도에 달하여 성직자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에게 오히려 해독을 끼치고 있다. 성직자들의 대부분이 공공연하게 첩을 두고 있으며 만약 교회에서 이를 처벌하고자 한다면 이에 반항하여 오히려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들은 폭력을 사용해서까지 정의의 수행을 막고 있다. 교황의 자격이 없는 자들이 교황의 자리를 탈취하고자 했고 십자가의 복음보다 르네상스의 영광에 심취하고 있었다.[43]

 

중세 이후 부패 된 교회 지도자들의 실상을 알리는 이사벨라의 글은 종교개혁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서 루터(Martin Luther)로부터 시작되었다.[44]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인문주의 운동과 중세 말기의 종교의 타락이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초기 형성된 신앙의 모범과 거리가 멀었다. 가톨릭 교회는 본질 없는 의식적 종교 행위로 물들어 음악 전문 연주인들을 고용하여 교회 예배를 화려하게 치장하였다.[45] 또한 그들에 의해 견고해진 성직 제도는 강력한 권력 체계를 갖게 하였고, 성직자들의 성적 타락과 폭력적 공권력은 교회와 사회를 어지럽게 하여 당시 사람들로 교회에 대한 희망을 잃게 하였다. 결국 그들의 면죄부는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46] 학자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성공 요인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문화적 발전인데, 극동 여행을 활발하게 하였고 새롭게 고안된 인쇄술을 통해 각 지역의 최신 정보와 학문들이 활발하게 교류하게 되어 종교개혁의 활로가 되어 주었다.[47] 둘째는 종교개혁 당시 정치적인 상황이다. 종교개혁은 ‘형태를 되돌림’을 의미하며, 이는 원형으로 복원하는 것을 말하는데, 루터는 본래 새로운 교회의 모습으로 개혁하려 한 것이 아니라 본래(초기교회)의 상태로 회귀하려 했다.[48] 오즈맹(Steven Ozment)는 종교 개혁의 성공에 대해 “16세기 전반기의 주요 정치적 경쟁 관계와 왕조적 갈등을 고려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관심이 여러 곳으로 분산된 것이 주요 성공 요인”이라고 하였다.[49] 슈누아(Eva-Maria Schnurr)는 루터에 대한 신학적 논쟁으로 황제와 제후들 사이에 힘겨루기가 있었고, 제후들이 누리던 이권을 다시 얻고자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들은 새로운 종파를 받아드렸다고 하였다.[50] 루터의 회기 신학은 기사 계급과 농민 계층의 지지로 농민 봉기를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어 더욱 강력한 세금과 노역을 부과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종교 개혁은 진보와 보수의 억눌렸던 힘을 발화하게 하였다.[51] 이러한 현상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에 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16세기의 다양한 종교 집단을 유형화하였는데, 루터파는 보수적이고 온건했고, 칼뱅파와 츠빙글리(Ulich Zwingli)파는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이며, 재세례파와 영성주의자는 급진적 개혁가들이었으며, 복음적 합리주의자는 자유주의적이고 근대적이었다.[52] 나아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사 중심주의(Sacramentalism)와 사제 중심주의(Sacerdotalism)을 배격하였다”고 평가하였다.[53] 이후 종교개혁은 교회 전체를 개혁하지 못하고, 개혁을 요구했던 자신들 또한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개혁은 필립 샤프의 지적처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성경과 회중 중심의 실천적 개혁 운동의 근거가 되어 준 것에 큰 의미가 있다[54].

(2) 종교개혁 예배와 중세교회 음악

교회는 ‘예배 공동체’이다(롬12:1). 이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결국 예배의 개혁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부정했고 성례전들을 개혁했으며, 말씀 중심의 예배를 세웠다.[55] 조직신학자 ‘이오갑’은 종교개혁 예배의 특성을 네 가지로 정리하였는데, 종교개혁은 예배를 구원의 조건이 아닌 결과로 간주하게 했으며, 둘째, 예배를 교회의 유익을 위한 방편이 아니라,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드리게 하였다.[56] 셋째, 종교개혁은 말씀 중심 예배를 형성하게 하였고, 넷째, 다양한 형태의 예배 개혁을 일으켜 발전하게 하였다.[57] 이처럼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으로써 그 역할을 다하였다. 7세기에 이르러 오랫동안 발전해온 로마교회 찬가의 선율들은 교황 그레고리 1세(590-604)에 의하여 집대성되었으며, 예배의 개혁과 교회음악을 개선하기 위해 평조곡(Plainsong)[58]으로 된 선율들을 모아 집성한 것이 그레고리 성가이다.[59] 당시 세속음악이 운율적이고 춤추는 듯한 특성이 있었는데, 그와 달리 중세교회 예배음악의 특징은 운율 없는 단선율 음악이었다.[60] 중세 이후 종교 개혁시대까지의 교회음악은 음악적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박은규는 10세기 이후 다성음악의 발전과 전문 음악인들 중심의 교회 찬송이 회중을 예배의 구경꾼으로 전락하게 하였다고 평가하였다.[61] 다음은 이러한 중세 이후 교회음악에 배경을 바탕으로 대표적인 종교 개혁자 루터, 칼뱅 그리고 츠빙글리 등의 찬송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다.

3) 종교개혁 시대의 찬송

본 장은 종교 개혁자들의 찬송 중심으로 살펴볼 것인데, 먼저 종교 개혁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개혁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 이후 루터, 칼뱅, 츠빙글리의 찬송 신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서론에서 다루었던 것처럼 본 강좌에서 의미하는 아카펠라 찬송은 다성부 찬송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선율도 포함하고 있다. 라틴어 아카펠라는 ‘교회식으로’의 의미로, 앞에서 살펴보았던 사항이다. 그러므로 이후에 다룰 칼뱅의 단선율은 아카펠라 찬송 신학과 연관성이 있음을 밝힌다.

(3) 종교 개혁자들의 찬송

16세기 가톨릭교회는 전문 음악 사제들을 등용하였고 예배음악에서 회중을 고려하지 않았다.[62]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한 라틴어 찬송집은 당시 신자들의 찬송 활동에 큰 어려움을 주었는데, 루터는 라틴어 찬송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63] 개신교에서 루터는 교회음악의 기틀을 만든 인물로 평가된다.[64] “독일 신학자 슈바르츠(Hans Schwarz)는 루터를 개신교 교회음악의 아버지라고 평가했다.”[65] 루터는 교회의 음악 사용에 대해 어떤 종교개혁자들 보다 자유로웠으며, 교회음악론을 가졌던 유일한 사람을 인식된다.[66] 루터는 찬송을 하나님께 향한 찬양의 기능뿐만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로도 강조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음악을 통해 복음을 전하실 것을 확신하였다.[67] 루터는 만인 제사장을 강조했지만, 예배에서 성가대를 없애지 않았는데, 이상일은 루터가 예술적인 다성음악을 연주하고, 새로운 찬송을 회중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성가대가 필요했다고 하였다.[68] 홍정수는 루터의 찬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첫째, 음악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했으며, 둘째, 찬송에 기악을 허용하였고, 셋째, 음악을 통한 기쁨은 죄가 아니라는 것으로 인식했고, 넷째, 음악을 통한 말씀 교육을 강조하였으며, 다섯째, 음악의 문화적 영향력 인식하였고, 여섯째,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으며, 일곱째, 음악은 성도가 말씀의 부름에 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고, 여덟째, 음악은 영적 침체를 없앨 수 있다고 보았다. [69]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루터는 교회가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 당시 누구보다 더 개방적이었다. 특히 교육, 전도의 측면과 영적 성숙을 위해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다른 종교 개혁자들에 비해 잘 연구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음악에 대한 정보는 미비하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교회음악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는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음악 활동을 할 정도로 악기를 잘 다뤘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종교 개혁자 중 예배음악에 가장 부정적이었다.[70] 츠빙글리의 예배 개혁에서는 회중을 고려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데, 전통적 미사의 집례를 거부하여 회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예배드렸으며, 성도들이 기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71] 그는 회중에게 구약 시편을 교창 형식으로 부르게 했으며, 높은 수준의 성가대를 회중이 대체하도록 노력하였다.[72] 그는 기악을 교회에서 제거했으며 다성부 찬송을 부르지 않고 단선율 찬송을 부르게 했다는 점에서 칼뱅의 찬송 신학 한 흐름을 같고 있다. 1525년 츠빙글리는 예배에서 음악을 완전히 배제하려고 했으나 교회사적 영향력은 미비했다고 평가되고 있다.[73]

 

칼뱅(Jean Calvin)은 가톨릭의 예배 의식과 전례들을 강하게 반대하였는데, 성경에 없는 인위적인 가사 대신, 시편을 찬송하도록 하였다.[74] 칼뱅은 찬송의 회중성을 강조했으며, 모든 사람이 쉽게 부를 수 있는 단선율 찬송을 부르도록 하였다.[75] 칼뱅은 음악가 마로(Clement Marot) 그리고 베자(Theodore de beza)와 함께 시편을 운율 의역(metrical paraphrases)[76]하여 악보로 출판하였으며, 그들이 죽은 후에도 유능한 작곡가 부르주아(Louis Bourgeois)와 함께 1562년 제네바 시집을 발행하였다.[77] 칼뱅은 성도들이 찬송을 쉽게 부르기 위해 화성에 반대했지만, 음악가 부르주아와 구디멜(Claude Goudimel) 그리고 르쥬느(Claude  Lejeune)에 의해 다성 편곡된 찬송집이 출판되기도 하였는데, 결국 가정에서만 사용하도록 하였다.[78] 칼뱅 자신의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기도와 찬송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만약 기도로 중재하되 깊은 마음의 정서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면 목소리와 노래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며 아무 유익도 없다는 것이 여기서 명명백백하다. 그렇지 않고 만약 목소리와 노래가 단지 입술의 끝과 목으로부터만 나온다면 그것들은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진노를 자아낼 것이다.[79]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우리는 목소리와 노래를, 그것들이 영혼의 정서를 따르고 그것에 도움을 주는 이상, 비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신념으로 정신을 훈련시키며, 미끄러지고 쉽게 느슨해지고 여러 모양으로 흩어지는 그것을 팽팽하게 붙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육체의 각각의 부분은 마땅한 방식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어야 하기 때문에, 혀가 노래하고 말함으로써 이 사역을 위해 바쳐지고 헌신 되었다는 것은 특별히 합당하다. 혀는 독특하게 하나님에 대한 찬미를 풀어서 말하고 선포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그러나 혀의 제일의 용도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한 영과 동일한 믿음으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한 목소리와 마치 하나의 입으로 하듯이 모든 사람들이 같이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행하는 공적인 기도들 가운데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의 형제로부터 서로 믿음의 고백을 받음으로써 그의 예로 권유를 받게 되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난다.[80]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 칼뱅의 찬송은 목소리로만 부를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고백 돼야 함을 강조하였고, 찬송과 기도를 한 맥락에서 이해하여 모든 성도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 따라서 칼뱅이 찬송에서 기악을 배제하고 오직 목소리를 통해 단음 찬송하게 한 것은 회중으로 가사에 집중하여 영혼의 감동으로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다.[81] 칼뱅은 회중을 위해 자국어 찬송을 직접 작곡하기도 했으며, 찬송 활성화를 위해 음악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세속음악과 구별되기 위해 장중하고 위엄있는 찬송 창작 활동을 했다.[82]

 

앞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종교 개혁자들은 16세기 당시 가톨릭 교회음악을 격렬히 반대하였다. 츠빙글리, 그리고 칼뱅 등은 찬송의 회중성을 강조했고, 기악 찬송을 거부하였다.[83] 이에 비해 루터는 성가대의 코랄 합창과 악기에 융통성이 있었다.[84] 다만 루터의 공예배시 악기 사용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상반된 주장도 존재한다.[85] 정지현 박사는 종교 개혁자들의 악기 배제 현상이 현대 교회 찬송의 무분별한 기악 사용에 대해 경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86] 본 강좌에서는 아카펠라 찬송이 음성을 제외한 육성 찬송을 의미함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칼뱅의 단음 찬송도 아카펠라 찬송에 한 흐름으로 인식할 수 있다. 루터가 음악에 개방적인 것에 비해, 츠빙글리는 폐쇄적이었는데, 그는 음악에 세속성 때문에 찬송에서 음악을 금지하려고 했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반음악적 성향은 교회 음악 역사에 비난의 실마리가 되었다. 다만 그가 기악을 금지하고 목소리로 찬송하게 했다는 것은 아카펠라 찬송이 추구하는 기악 배제와 한 흐름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종교개혁 이후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John Wesle)와 침례교의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등도 기악을 반대하고 육성 찬송을 주장했다.[87]

[1] 본 강좌에서 말하는 초기교회는 예수 처형 이후 유대교와 분리된 초기 기독교를 말한다.

[2] 주전 400년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의 시기를 침묵의 시기라고 불렀다.

[3] Andreas J. Kostenberger, The Cradle, the Cross, and the Crown: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김경식 역, 『신약개론 요람,십자가,왕관』 (서울: CLC, 2013), 136.

[4] Robert E. Webber, 김세광 역, 『예배가 보인다 감동을 누린다』, 56.

[5] 박은규, 󰡔예배의 재구성󰡕, (서울: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33), 327.

[6] William D. Maxwell, A History of Christian Worship, 장정복 역,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서울: 쿰란 출판사, 1996), 15.

[7] 교창은 찬송 인도자와 회중이 한 문장의 가사의 반이나, 문장 단위로 번갈아 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8] 박은규, 326.

[9] Maxwell, 15.

[10] Winfred Dougles and Leonard Douglas, Church Music in History & Practice Revised,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62), 11-24.

[11] Ferguson, 『초대교회 배경사』, 190.

[12] Ibid., 190-91.

[13] 위키백과, "Dura Europos Church", https://en.wikipedia.org/wiki/Dura-Europos

_church#/media/File:DuraEuropos-Church.jpg, (2020.01.08)

[14] 이상규, 󰡔헬라 로마적 상황에서 기독교󰡕 (서울: 한들출판사, 2006), 81-2. 

[15] Maxwell, 14.

[16] Maxwell, 17-8.

[17] 번역서에는 ‘주기도문 암송’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본 강좌에서는 신학적 차로 인해 수정 인용하였다.

[18] Gordon S. Wakefield, An Outline Of Christian Worship, 김순환 역, 『예배의 역사와 전통』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7), 24.

[19] Ibid.

[20] Webber, 『예배학』, 43-4.

[21] Yu Kitagawa, Popular Ongaku Riron, 김정태 역, 󰡔파퓰러음악이론󰡕 (서울: 삼호뮤직, 2000), 42, 161.

[22] 혼합절충주의는 여러 다른 종교, 철학, 사상 등을 혼합하는 것을 말하며, 서로 대립 되는 부분은 절충해 조화시키는 것을 말함.

[23] 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엄성옥 역, 『초대 교회사』 (서울: 은성, 2012), 34.

[24] 정서미 편, 󰡔성서 배경사: 창조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서울: 대서, 2015), 291-92.

[25] Gonzalez, 35-6.

[26] 입신은 신이 인간의 몸에 깃드는 것을 의미함. 신비 종교에서는 입신을 최고의 경지로 여김.

[27] G.E.M. de Ste. Croix, The Religion of the Roman World, 지동식 편역, 『로마 제국과 기독교』 (서울: 한국 신학 연구소, 1983), 28-9.

[28] Kostenberger, 139.

[29] 복술: 새가 나는 형태를 지켜봄으로 미래 사건을 예측하는 등의 행위.

[30] Kostenberger, 139.

[31] 정서미 편, 291-92.

[32] F. F. Bruce, The Spreading Flame, 심창섭 역, 『초대 기독교 역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9), 324.

[33] Ibid., 318-28.

[34] Ibid., 318-20.

[35] 박경수, 󰡔박경수 교수의 교회사 클래스󰡕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26-30.

[36] Gonzalez, 110-12.

[37] Webber, 『예배학』, 24-6.

[38] ‘신전 매음에 관한 규정’(가톨릭 성경 참조)   

   18 이스라엘의 딸은 신전 창녀가 되어서는 안 되고, 이스라엘의 아들은 신전 남창이 되어서는 안 된다. 19 너희는 창녀의 해웃값이나 남창의 몸값을, 주 너희 하느님의 집에 어떤 서원 제물로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둘 다 역겨워하신다.

[39] Johannes QuAsten, Music and Worship in Pagan and Christian Antiquity (Washington: National Association of Pastoral Musicians, 1983), 243.

[40] Ferguson, A cappella Music in the Public Worship of the Church, 5.

[41] Ibid., 3.

[42] 특별히 신약성경이라고 한 것은 기독교 예전은 유대교의 전통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유대교는 구약 전통을 계승했고 기독교는 신약 전통을 계승한다. 

[43] Gonzalez, 15.

[44] Peter Marshall, The Reforma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First Edition, 이재만 역, 『종교개혁』 (서울: 교유서가, 2016), 27.

[45] 박은규, 344.

[46] Ibid., 31.

[47] Gonzalez, 20.

[48] Diemar Pieper and Eva-Maria Schnurr, Die Reformation, 박지희 역, 『1517 종교 개혁』 (서울: 북이십일 21세기북스, 2017), 22.

[49] Steven Ozment, The Age of Reform, 이희만 역, 『종교 개혁의 시대 1250-1550』 (서울: 한울, 2020), 15.

[50] Pieper and Schnurr, 24-5.

[51] Ibid., 24.

[52] Ozment, 468.

[53] Philip Schaff, About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Modern Christianity 

   Volume VI The German Reformation (Grand Rapids,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1882), 334.

[54] 이오갑, “루터 신학과 영성의 개요,” 󰡔신학사상󰡕 vol.178(2017): 109-11.

[55] 이오갑, “종교개혁의 예배와 신학,” 󰡔복음과교회󰡕 vol.9(1997): 93-107.

[56] Ibid., 117-18.

[57] Ibid., 118-19.

[58] 교회에서 사용되는 악기 없이 단순한 노래의 한 유형.

[59] 박은규, 335.

[60] Ibid., 341.

[61] Ibid., 343.

[62] 조숙자, 조명자, 『찬송가학』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90), 58-60.

[63] 문성모, “마틴 루터의 예배음악에 대한 신학적 이해,” 『낭만음악』 vol.32 (1996): 57.

[64] 이상일, “루터의 음악신학과 예배에서의 음악사용” 󰡔장신논단󰡕 vol.48 no.4 (2016): 92. 이상일은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65] Hans Schwarz, "Martin Luther and Music," Lutheran Theological Journal 39/2-3 (2005), 214. 이상일. 10. 재인용.

[66] 홍정수, 『교회음악 예배음악 신자들의 찬양』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2), 223.

[67] 이상일, 103.

[68] Ibid., 111.

[69] 홍정수, 『교회음악개론』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출판사, 1995), 29-34.

[70] Lewis W. Spitz, The Reformation, 서영길 역, 『종교개혁사』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2), 142-43.

[71] 박봉석, 『음악과 사상』 (서울: 아가페 음악 선교원, 1984), 120.

[72] Maxwell, 121.

[73] Ibid., 120.

[74] Donald J. Grout, A History of Western Music, 서우석 역, 『서양음악사』 (서울: 심설당, 1986), 185. 

[75] John D. Witvliet, “The Spirituality of the Psalter: Metrical Psalms in Liturgy and Life in Calvin's Geneva,” Calvin Theological Journal, vol.32 (1997): 281.

[76] 칼뱅은 시편을 자국어로 바꿀 때, 회중의 찬송 활동에 용이하도록 음절 등을 일정하게 통일시켜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

[77] 조숙자, 조명자, 92-6.

[78] William Jenson Reynolds and Milburn Price, A Survey of Christian Hymnody, 이혜자 역, 『찬송가학』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1997), 75-6.

[79]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and introduction by Ford Lewis Battles: 1536 Edition trans, 양낙흥 역, 『기독교 강요』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8), 246.

[80] Calvin, 247-48.

[81] 정창은, “한국교회 예배음악의 갱신 방안 연구- 루터·칼빈·웨슬리의 회중찬송을 중심으로”, (박사논문,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2017), 125-26.

[82] Ibid., 129-32.

[83] 하재송, “칼빈의 교회음악 사상과 교회음악의 개혁주의적 원리,” 『총신대학교 논문집』 Vol.28 (2008): 484.

[84] John Barber, "Luther and Calvin on Music and Worship" Reformed Perspectives Magazine Volume 8, June 25 2006 <http://reformedperspectives.org/articles/joh_barber/PT.joh_barber.Luther.Calvin.Music.Worship.html>

   본 출처에서의 내용은 “루터의 음악 개혁에는 악기를 예배에 사용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루터의 영향력을 통해, 새로운 영적 운동, 새로운 예배 예전, 그리고 많은 음악적 관습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예배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주고 있다.” (Luther's musical reforms included the use of instruments in worship. Through Luther's influence, a new spiritual movement, a new liturgical service, and many new musical practices were introduced that continue to inform the worship of present-day Christians.) 

[85] John McClintock and James Strong, “Mcclintock & Strong’s Encyclopedia, Vol 6”. (Ada, Mi: Baker Academic, 1982), 762. 위 성경 주석에서는 루터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됐다. 루터는 “예배 중 오르간은 바알의 휘장이며(즉 우상 숭배의 상징으로), 로마 가톨릭이 유대교로부터 빌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자료는 루터가 기악 찬송에 부정적인 입장임을 보여준다. 

   (The organ in worship is the insignia of Baal... The Roman Catholics borrowed it from the Jews.)

[86] 정지현, “종교 개혁적 시각으로 본 한국 교회 CCM에 관한 연구”, (박사논문,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2010), 110.

[87] 그리스도의교회출판사 편집부, “교회와 악기,” 󰡔그리스도의교회󰡕 Vol 13 (2014): 9-20.

​2과 목차로 바로가기
(버튼을 클릭하세요)

bottom of page